사건의 발달
그날의 일은, 돌이켜보면 필연적인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가문을 짓눌러왔던 지독한 저주가 마침내 끝났다는 안도감. 그 해방감은 김지헌에게 잠시나마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주(毒酒)와도 같았다. 그는 모든 위협이 사라졌으니, 이제야말로 백가연을 온전히 자신의 품 안에 두고,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오만이었고, 착각이었다. 그는 저주를 끊어냈다는 자만심에 취해,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조정에서 내려온 긴급 공문이었다. 금천현 인근에 출몰한 야귀 무리를 토벌하라는 어명. 저주가 사라졌다 한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야귀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김지헌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토벌대의 무자비한 칼날이, 혹여나 백가연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 그는 그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백가연에게 잠시 내아(內衙)에 머물러달라 명했다. 그것은 명령이자, 강요였다. 그녀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해진, 또 다른 형태의 새장이었다.
물론, 백가연은 그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으며, 그에게 종속된 존재이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그의 불안이 빚어낸 이기적인 통제를 꿰뚫어 보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의녀(醫女)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야귀에게 습격당한 백성들을 돌보러 나섰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 김지헌의 이성은 무너져 내렸다. 불안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그의 안에서 폭발했다. 그는 당장 그녀를 찾아 나섰고, 위급한 환자를 돌보고 있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주변의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는 그녀를 향해 폭언을 쏟아냈다. 자신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한 분노,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그녀에 대한 서운함까지. 그는 이성을 잃고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과 경멸의 빛을 마주하고서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백가연은 그날 이후, 그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그 어떤 비수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결국, 그는 붓을 들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경솔함, 그리고 지독한 소유욕이 빚어낸 과오를 인정하고,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는 밤새도록 자신의 죄를 곱씹으며, 한 자 한 자, 반성문을 써 내려갔다. 그가 지은 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었음을, 그는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가 내민 것은 잘 마른 백지(白紙) 위에 먹으로 꾹꾹 눌러쓴, 그의 필적이 선명한 글이었다. 여느 공문서에서 보이던 유려하고 힘 있는 필체와는 사뭇 달랐다. 군데군데 먹이 번지고, 어떤 글자는 마치 망설인 듯 희미했으며, 또 어떤 글자는 감정이 격해진 듯 날카롭게 획이 뻗어 있었다. 그것은 사또 김지헌이 아닌, 한 사내 김지헌이 쓴 글이었다. 그의 모든 자존심과 오만, 그리고 후회와 연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의 영혼의 조각이었다.
나의 하늘이자, 나의 구원인 가연에게
이 서찰을 쓰는 지금, 나는 붓을 든 손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고, 먹을 가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너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쓰는 이 글이, 되려 너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허나, 이 마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순간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 이리 무릎 꿇는 심정으로 붓을 들었다.
가연아. 나의 잘못을 변명할 생각은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억압하고, 지킨다는 명분으로 너를 가두려 했던 나의 모든 행동은, 나의 어리석고 이기적인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눈이 멀어, 정작 너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너를 새장에 가두려 했던 나의 오만함을, 나는 이제야 뼈저리게 깨닫는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너를 모욕하고, 너의 의지를 꺾으려 했던 나의 모든 언행은, 그 어떤 말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강요했다. 나의 방식대로 너를 사랑하고, 나의 세상 속에서 너를 소유하려 했다. 그것이 너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너의 그 차가운 눈빛과, 경멸이 담긴 목소리가… 밤마다 나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하다. 너는 나를 ‘저급하다’ 하였지. 그렇다. 나는 저급하고, 비열하며,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사내다. 너라는 빛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어둡고 추악한 그릇이었음을… 나는 이제야 인정한다.
그러니… 부디, 나를 용서치 말아다오. 다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내가 너에게 행했던 모든 어리석은 짓들은… 너를 잃고 싶지 않았던, 한 사내의 절박하고 서툰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너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하는, 나약한 나의 진심이었다는 것을. 만약… 만약 네가 나를 떠나기로 결심한다면, 나는 그 어떤 원망도 없이 너의 선택을 받아들일 것이다. 다만, 내가 살아 숨 쉬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를 연모하는 이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임을… 이 찢어지는 심장에 맹세한다.
죄인, 김지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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