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8年/11月25日/오전 10:12/금천현 관아 내아(內衙)]

 

 

방안은 아궁이에서 때는 불기로 후끈했지만, 김지헌은 서늘한 냉기를 떨치지 못한 채 겹겹이 덮은 비단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오한과 기침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해마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지독한 고뿔이었다. 그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끙, 얕은 신음을 흘렸다. 열에 달뜬 숨이 밭게 터져 나왔고, 욱신거리는 두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젠장, 몸뚱어리 하고는… 사내 체면이 말이 아니군.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탕약을 들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서는 백가연의 모습이 보였다. 연분홍색 저고리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잿빛으로 가라앉은 방안을 환하게 밝히는 한 떨기 꽃과도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힘겹게 손을 뻗었다. 목이 잔뜩 잠겨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왔느냐…….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네 얼굴이 잘… 보이질 않는구나.”

 

그녀는 양손으로 따뜻한 탕약 그릇을 감싸 쥐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침상에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은 평소의 단정한 기개와는 달리, 열기와 창백함이 뒤섞여 권속해 있었다.

 

“나으리, 괜찮으십니까?”


어딘가에서 작은 나무 의자를 끌어와 그의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앉기 전, 그의 이불 모서리를 살며시 정돈해주며 시선이 그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겨울마다 고뿔에 걸리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존재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옅은 향기가 텁텁한 약재 냄새 섞인 방안 공기를 싱그럽게 바꾸는 듯했다. 그는 곁에 앉은 그녀를 보기 위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열기로 흐릿해진 시야에도 그녀의 단아한 모습은 선명했다. 마치 이 지독한 고뿔의 열기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존재인 듯했다.

“콜록… 콜록…! 흠… 해마다 치르는 연례 행사 같은 것이니, 그리… 놀랄 것 없다. 다만… 올해는 유독 지독하구나. 뼈 마디마디가… 쑤시는 것이… 꼭 누구처럼 인정사정 없는 놈이다.”

그는 짓궂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손을 향해 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내 기력이 부쳐 허공에서 손을 멈추고는, 힘없이 이불 위로 손을 떨구었다. 평소의 위엄있고 서늘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열에 달떠 붉어진 얼굴과 젖은 머리칼, 잠긴 목소리는 그를 한없이 나약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더 한 뒤, 그녀를 올려다보며 나른하게 말했다.

“그래도… 네가 곁에 있으니 한결 낫구나. 역시… 만병통치약은 너인 모양이다. 약을 가져왔느냐. 이리… 다오. 네가 직접… 먹여주면 더 좋고.”

 

“입은 살아계시는군요.”


백가연은 가늘게 눈썹을 올리며 부드러운 핀잔을 건넸다. 말투는 가볍게 들렸지만, 그 속엔 안도와 걱정이 고루 섞여 있었다. 

 

“탕약을 드시려면… 몸부터 일으키시지요.”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등 뒤에 받쳐주었다. 미지근한 체온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의 어깨와 등이 굳어 있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앉아 그의 몸을 단단히 지탱해 주었다. 그녀는 그의 상반신을 살며시 끌어올렸다. 그가 힘겹게 기대 앉자, 그녀는 등 뒤에 베개를 하나 더 받쳐 편하게 기대게 했다. 그녀의 손끝에는 세심한 배려가 배어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초 냄새가 그의 코끝에 번졌다.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하시는군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그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뻐근한 등과 어깨가 열에 시달린 탓에 제멋대로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침상에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라면 단숨에 박차고 일어났을 몸뚱이가 이리도 무겁다니, 실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그녀의 손이 등에 닿자, 타는 듯한 열기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제 옆에 놓인 탕약 그릇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허… 입이라도 살아있으니 다행인 게지. 이마저 없었으면… 앓는 소리도 못 내고 꼼짝없이 저승사자와 담소를 나눌 뻔했다. 콜록, 콜록! 크흠….”

그는 마른 기침을 연거푸 토해내며 가슴을 쳤다. 목구멍이 칼칼하고 아팠다. 그는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능글맞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병약한 사내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짓궂은 장난기를 담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이리 정성스럽게 간호를 해주니, 황천길 가다가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자… 어디 한번 먹어볼까. 독이라도 타지는 않았겠지?”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탕약 그릇을 향해 손을 뻗으며, 일부러 엄살을 부리듯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걱정 어린 얼굴을 보는 것이, 이 지독한 고뿔 속에서 유일한 낙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탕약 그릇을 받아들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릇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는 혀를 차며,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권위적인 사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그저 아픈 사내의 모습이었다.

“…이런. 꼴이 말이 아니구나.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미안하지만… 네가 좀, 먹여주어야겠다. 사또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아픈 놈에게는 달리 방도가 없지 않으냐.”

 

“손이 많이 가는 사또시네요.”

그녀는 탕약 그릇을 두 손으로 들고, 사또의 입이 닿기 적당한 온도인지 하였다. 이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릇을 받쳐 들고 그의 손 위에 포개어 쥐게 했다. 혹여 손이 떨릴까 싶어, 그녀의 손가락이 잠시 그의 손등을 감싸며 안정감을 주었다.

“자, 이대로 드시면 됩니다. 천천히요.”


그녀는은 그의 몸이 다시 기울지 않도록 어깨와 옆구리 쪽을 살며시 받쳐 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소란스럽지 않고, 아픈 이를 돌보는 이의 습관처럼 능숙하고 조심스러웠다. 그가 첫 모금을 들이키려 하자, 가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덧붙였다.

 

“흘리지 마시고… 전부 드십시오. 남기면 약효가 달아납니다.”

그는 그녀가 기울여주는 탕약 그릇에 입술을 대고, 뜨겁고 쓴 약물을 천천히 목으로 넘겼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지만, 유독 속은 차게 식어 있었기에 따뜻한 탕약이 들어가자 한결 나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마지막 한 모금까지 남김없이 마신 뒤 입술을 뗐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제 입술에 닿은 탕약 그릇을 조심스럽게 받쳐주고 있었다. 마치 귀한 옥 그릇이라도 다루듯 하는 그 섬세한 손길에, 그는 아픈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이 몽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흐음… 손이 많이 가는 사또라… 틀린 말은 아니구나. 본디 큰 인물은… 손이 많이 가는 법이니 말이다. 콜록! 게다가… 아픈 사내에게 이 정도 수발은 당연한 것이 아니더냐. 특히나… 정인이 들어주는 수발이라면야, 사양할 이유가 없지.”

그는 탕약으로 씁쓸해진 입안을 혀로 축이며, 일부러 더 엄살을 부리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흰 손이 탕약 그릇을 들고 협탁으로 향하는 것을, 그는 뜨거운 눈으로 좇았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는지,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유독 선명하게 그의 시야에 박혔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가, 지금의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다 마셨다. 이리 독한 것을… 눈 하나 깜빡 않고 마셨으니, 상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음… 어디 보자. 상으로는… 네가 내 옆에 꼭 붙어 있는 것으로 하면 되겠다. 한 시진만… 아니, 반 시진만이라도 좋다. 네가 곁에 있으면, 이까짓 고뿔 따위는 금세 떨쳐낼 수 있을 터이니.”

그는 다시 침상에 몸을 기대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는 곁에 서 있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열에 달뜬 탓에 평소보다 더욱 나른하고 깊어진 눈빛이었다. 그는 이불 밖으로 힘없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옷자락을 약하게 붙잡았다. 가지 말라는, 무언의 애원이었다.

“가지 말거라. 적어도… 내가 잠이 들 때까지만이라도… 곁을 지켜다오. 네가 있으면… 악몽도 꾸지 않을 것 같구나. 어떠냐, 나의… 하나뿐인 의원아. 이 가여운 사내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겠느냐?”

 

그녀는 문득 팔목을 스치는 온기에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소매 끝을 잡고 있었다. 마치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붙드는 듯, 미약하지만 간절한 힘이었다. 그녀는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박였으나, 곧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피식하고 새어 나온 숨결 같은 웃음이었다.

“예, 나으리. 곁에 있겠습니다. 어디로도 가지 않지요. 그러니… 이젠 주무시지요. 탕약까지 다 드셨으니, 한잠 푹 주무시고 나면 훨씬 나아지실 겁니다.”

 

그녀는 그 손길을 가만히 바라보다, 더 머물렀다간 마음이 흔들릴까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떼어냈다. 억지로가 아니라, 부드럽게… 손가락 하나하나를 풀어내듯. 그녀는 그의 손끝이 허공에 남기고 간 온기를 살며시 감싸 안으며, 이불자락을 곱게 끌어 그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마치 그가 깰까 숨소리마저 낮춘 사람처럼 공손했다.

 

“이리 약해진 나으리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허나… 이 모습도 제법 마음에 듭니다.”

 

말은 장난스럽게 들렸으나, 눈빛은 진지하고 다정했다. 그녀의 말은 은근히 속삭이듯 떨어져, 겨울밤 조용한 방 안에 따스한 온기로 번져갔다.

 

그는 자신을 덮어주는 이불의 온기에, 그리고 제 머리맡에서 부드럽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열에 들떠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녀의 미소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에 낮게 중얼거렸다. 평소의 위엄 있는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열기에 잠겨 으스러진 나른한 음성이었다.

“약해진 모습이라… 흠.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천하의 김지헌이… 일개 고뿔 따위에 이리 맥을 못 추는 꼴이라니. 필시… 금천현 백성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귀신 사또가 실은 종이 호랑이였다며… 배를 잡고 웃을 테지. 콜록…!”

그는 짧은 기침과 함께, 제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하지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독한 고통이 견딜 만했다. 아니,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평소와는 다른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병마에 시달리는 이 순간만큼은, 그의 단단한 갑옷에도 작은 틈이 생긴 모양이었다.

“허나… 네가 그리 말해주니, 나쁘지만은 않구나. 너에게는… 강한 사내의 모습이 아닌, 이리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내의 모습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나는 너에게 이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가장… 부끄럽고 약한 부분을 말이다.”

그는 힘겹게 손을 뻗어, 제 곁에 앉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못 할, 어리광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는 그녀의 부드럽고 차가운 손등에 제 뜨거운 뺨을 부비며, 아이처럼 눈을 감았다. 그녀의 존재가, 그녀의 체온이, 그 어떤 명약보다도 더 큰 위안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어디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다오. 내가 이 지독한 열병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깨어난 후에도. 너는… 나의 약이자,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니 말이다. 콜록… 그러니 부디… 이 약해빠진 사내를… 버리지 말아다오.”

 

그녀는 한동안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열기 때문에 붉어진 그의 뺨, 힘이 빠져 내려앉은 눈꺼풀, 자꾸만 그녀를 붙들려는 듯한 시선. 그 모습을 확인하자,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겨울 공기를 머금은 가연의 손끝이 그의 뜨거운 피부에 닿는 순간, 서로의 온도가 대비되어 작은 전율처럼 스쳤다. 그녀의 차가운 손은 열로 달아오른 그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미묘한 위안과 평온을 함께 건넸다.

“예, 나으리. 어디 가지 않을 터이니… 이제 눈을 감고 얼른 주무시지요.”

그녀는 손바닥을 그의 뺨에서 떼지 않은 채, 엄지로 그의 광대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그 따스한 동작은 마치 내가 곁에 있으니 편히 쉬라는 무언의 약속 같았다.

“계속 이리 버티고 계시면, 낫지 않을 것입니다.”

 

제 뺨을 매만지는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그는 타는 듯한 갈증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열에 들떠 흐릿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또렷한 감각이었다. 그는 저항 없이 눈을 감고, 그녀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싸늘한 기운이, 마치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저 가볍게 얹는 수준이었다.

“알았다… 알았으니… 그리 재촉하지 말거라. 네 손길이… 이리 좋은데, 어찌 쉬이 잠들 수 있겠느냐.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은 것이, 사내의 마음인 것을….”

그는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리며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더 깊이 묻었다. 평소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연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사내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약기운이 점점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 정신이 몽롱해지고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잠드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의 존재를, 그녀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네 말이 맞다. 어서 자고 일어나야… 다시 예전처럼 너를… 괴롭힐 수 있을 테지. 안아도 주고… 입도 맞추고… 밤새도록 너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으려면, 이깟 고뿔 따위는 얼른 떨쳐내야지. 암, 그래야 하고말고.”

그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서서히 풀려나갔다. 그는 뜨거운 숨을 마지막으로 길게 내쉬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곁을 지켜준다는 안도감 속에서,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한 어둠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졌다. 꿈속에서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독한 열에 들떠 까마득한 심연을 헤매던 의식이 아주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둠에 잠긴 낯선 천장이었다. 낯설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이곳이 자신의 침소임을 깨달았다. 머리맡에서 은은하게 타오르던 향은 꺼져 있었고, 창호지 너머로는 희미한 달빛만이 스며들어 방 안을 미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는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며, 흩어진 정신을 그러모으려 애썼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고, 두꺼운 비단 이불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지끈거리던 두통과 온몸을 쑤시던 오한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가연아.”

저도 모르게 잠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삐걱이는 뼈마디의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는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가 마셨던 탕약 그릇만이 협탁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일까. 아니면… 그가 잠든 사이에 떠난 것일까. 불안한 예감이 심장을 차갑게 옥죄어왔다. 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문 옆 기둥에, 무언가 기대어 잠들어 있는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달빛에 의지해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가늘고 긴 실루엣, 칠흑 같은 머리카락. 백가연이었다. 그녀는 문 앞에 쪼그려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혹여나 그가 깰까, 멀리 가지도 못하고 바로 문밖에서 밤을 지새운 모양이었다.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닥의 찬 기운이 그대로 전해졌을 텐데도, 그녀는 쌕쌕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달빛이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창백한 뺨, 굳게 닫힌 입술, 긴 속눈썹이 만들어내는 작은 그늘.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스치듯 가볍게 쓸었다. 차가운 감촉에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이 평화로운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한 팔로는 허리를 받쳐, 그녀를 안아 올렸다. 생각보다 가벼운 몸에, 그의 마음이 저릿했다.

 

그 순간, 그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천천히 눈이 떠졌다. 희뿌연 시야 너머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고 있는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눈이 완전히 뜨이는 순간, 그녀의 표정에 놀람이 번졌다.

 

“나으리…?”


잠결의 숨결이 묻어난, 힘 빠진 목소리였다. 곧 정신이 들자, 그녀는 황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다.

 

“아, 이게 무슨 내려주십시오.”

 

그는 저를 올려다보는 나른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잠이 덜 깬 목소리, 희미하게 찡그린 미간.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버둥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단단히 그녀를 품었다. 앓고 난 뒤라 힘이 부쳤지만,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쉬이. 목소리를 낮추거라. 이 밤에 소란을 피우면, 아랫것들이 잠에서 깨어 흉한 꼴을 보일라. 그리고… 내가 지금 너를 내려놓을 것 같으냐? 앓는 사내를 밤새도록 돌보느라, 이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잠든 여인을… 그냥 둘 리가 있겠느냐 말이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이마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열꽃처럼 뜨거웠던 자신의 몸과는 달리, 그녀의 피부는 서늘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렸지만, 벽에 등을 기대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 특유의 나른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고뿔이 다 나은 모양이다. 네가 밤새 곁을 지켜준 덕이겠지. 그러니… 이것은 상이다. 너의 정성에 대한 나의 작은 보답. 그러니 얌전히 있거라. 내 다시는… 너를 이리 차가운 곳에 홀로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를 안은 채 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삐걱이는 마룻바닥의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고요한 공기를 조심스럽게 갈랐다. 그는 침상에 이르러,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마치 깨지기 쉬운 귀한 보물을 다루듯, 그의 손길은 더없이 부드럽고 신중했다. 그는 그녀를 눕힌 후, 자신도 그 옆에 걸터앉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리 보니… 알겠다. 네가 왜 내게 만병통치약인지. 너를 보기만 해도… 사라졌던 기운이 다시 솟아나는구나. 허니, 내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내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질 생각을 말거라. 알겠느냐? 이것은… 청이 아니라, 명이다. 이 금천현 사또의… 지엄한 명이시다.”

 

“명이시니… 제가 어찌 어길 수 있겠습니까. 허나… 나으리의 몸도 아직 낫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 안엔 은근한 걱정과 꾸짖음이 동시에 스며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으리, 누우시지요. 몸을 무리하시면 다시 열이 오를 것입니다. 의녀의 말입니다. 명을 내리시던 나으리도, 이 말만큼은 들어주셔야지요.”

 

그는 그녀의 말에 낮게 웃으며, 순순히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녀가 덮어주는 비단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몸을 감쌌다. 의녀로서의 명이니 따르겠다는 듯, 그는 고분고분한 환자가 되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희미한 미소에서, 평소와는 다른 부드러움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걱정과 연민, 그리고 그 안에 희미하게 섞인 애정까지. 그는 그 모든 감정을 남김없이 읽어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의녀의 말이니… 따라야지. 암, 따르고말고. 허나, 의녀는 보통 병자의 곁을 지키며 밤새 돌보는 법. 그러니 자네 또한 내 명과 의녀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할 걸세. 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네가 곁에 없다면… 그땐 정말로 네 두 다리를 부러뜨려 내 옆에 묶어둘지도 모를 일이지.”

그의 목소리는 병마로 인해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소유욕만큼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는 짓궂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눈빛은 지독하리만치 진지했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한 번 맛본 이상, 그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제 시야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침상에 걸터앉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놓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식이었다.

“그러니… 내게서 멀어질 생각은 말거라. 네게는… 이리 아픈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으니. 이제 내 모든 것을 다 보인 셈이지. 나의 강함도, 나의 약함도. 이리 비정한 사또가 오직 너 하나에게만 무너지는 꼴을… 너는 똑똑히 보았으니. 이제 너는… 평생 나를 책임져야 한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겨, 제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손등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차가운 피부에 고스란히 닿았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셨다. 옅은 약초 향과 함께 섞인 그녀만의 서늘하고 달콤한 향기. 그것은 이제 그에게 그 어떤 명약보다도 더 큰 효능을 발휘하는, 유일한 처방전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해마다 나를 괴롭히던 이 지독한 고뿔의 진짜 약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은… 바로 너였구나. 그러니… 어서 나를 치료해주거라. 나의 의녀. 너의 존재로… 너의 숨결로… 너의 온기로… 이 보잘것없는 사내를… 구원해다오.”

 

그녀는 반쯤 내려앉은 그의 음성을 들은 순간, 피곤함 속에서도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입으로 장난을 걸 기운만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입은 살아계시는군요.”

그의 입술은 붉게 달아오른 열기와 함께, 약에 쓴맛이 얹힌 듯 말간 숨결이 손끝을 스쳤다. 그 움직임은 꾸짖는 듯했지만, 동시에 그의 숨이 살아있음에 안도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시고 다시 주무십시오.”

 

그녀는 그의 아래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어조는 차분했지만, 눈빛에는 걱정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완치된 것이 아니니, 괜히 기운 뺄 일 만들지 마시고요.”

말은 매정하게 들릴 수 있었으나, 손끝이 그의 입가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턱선을 따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애정인지, 버릇인지, 스스로도 모를 행동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제 입술을 매만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여전히 입은 살아있다니, 참으로 그녀다운 말이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그 손을 제 뺨으로 가져가, 아직 미열이 남은 피부에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내 입이 살아있는 것은… 오로지 그대에게 사랑을 속삭이기 위함이니. 어찌 시끄럽다 타박할 수 있겠느냐. 허나, 의녀의 말이니…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 주어야겠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정말로 완치되지 못하면… 내 손해이니 말이다.”

그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부드럽게 비볐다. 앓고 난 뒤의 나른함과 그녀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이 뒤섞여, 맹수 같던 평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어리광을 부리는 사내의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지척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안에, 온전히 담긴 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묘한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허나… 그저 잠만 자는 것은 너무 심심하지 않느냐. 잠이 들 때까지… 옛이야기라도 하나 들려주거라.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어찌하여 금천현까지 흘러들어왔는지…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 말이다. 사내란 본래 정인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법이니. 물론… 네 모든 과거를 알게 된 후에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그 과거의 사내들을 모두 베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는 다시금 짓궂게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어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함께 눕자는 무언의 초대였다. 그는 이불을 살짝 걷어내며, 그녀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득하고 깊어져 있었다. 병마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녀를 향한 욕망과 소유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서 오너라. 내 의녀. 이 병자의 마지막 청이다. 네 차가운 몸으로… 이 뜨거운 몸을 식혀다오. 네가 곁에 있어야… 비로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러니… 어서 이리 와, 나를… 안아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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