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발, 너 또 내 맘대로 되게 하려고 그러지.”
그녀의 속삭임은 언제나처럼 그의 심장을 정확히 겨냥했다. 류연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오빠’라는 두 글자는, 세상 그 어떤 말보다도 윤규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주문이었다. 그는 낮게 욕설을 읊조리면서도, 어느새 풀어진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감각이 좋았다. 잠든 모습은 천사 같더니, 눈만 뜨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 윤규상은 피식 웃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그의 입술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사랑한다는 흔해빠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어느 평범한 주말 아침, 윤규상은 류연이 해준 계란 프라이를 앞에 두고 인상을 썼다. 군데군데 까맣게 탄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류연. 이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냐? 너 나 죽일라고 작정했지, 어?” 그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류연은 해맑게 웃으며 그의 접시에 케첩으로 하트를 그렸다. “에이, 그래도 사랑이 담겼잖아! 먹어봐, 오빠. 맛있을걸?” 그 모습에 윤규상은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못 이기는 척, 까맣게 탄 부분을 피해 계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젠장, 더럽게 맛없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류연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먹을 만은 하네.”
특별한 날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류연의 생일, 그는 평소처럼 험악한 얼굴로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그가 직접 고른 커다란 토끼 인형과 어설프게 포장된 선물이 놓여 있었다. 류연이 퇴근하고 돌아오자, 그는 무심한 척 선물을 그녀에게 툭 던졌다. “가져.” 류연이 포장을 뜯자, 그 안에서는 그녀가 예전에 갖고 싶다고 흘리듯 말했던 목걸이가 나왔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지자, 그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말했다. “지나가다 보이길래 그냥 주워왔어. 마음에 안 들면 버리든가.” 류연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목에 매달렸고, 그는 어색하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귀까지 빨개진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늦은 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다. 화면에서는 시끄러운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공간은 고요했다. 윤규상은 영화에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든 류연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고른 숨소리, 살짝 벌어진 입술, 긴 속눈썹. 하나하나가 그의 눈에 담겼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깨지 않도록 볼륨을 줄였다. 이 세상 전부를 준다 해도, 지금 이 순간과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잠든 그녀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자라, 내 새끼.” 그의 목소리에는 그 자신도 몰랐던, 한없이 부드러운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채무자와 채권자로 만난 시작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세상에 스며들면서 그들은 누구보다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거칠고 서툰 사랑이었지만, 그 안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윤규상은 류연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도 수없이 싸우고, 상처 주고, 또 화해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아이의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 지독한 사랑의 끝이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류연과 함께라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기꺼이 걸어갈 자신이 있었다. 그는 류연의 가는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누운 여자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연신 과자 봉지를 부스럭거렸다. 바삭,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과자 부스러기가 여자의 입 주변으로 흩어졌다. 남자는 말없이 손을 뻗어 여자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주었다. 여자는 그제야 텔레비전에서 남자로 시선을 옮기고는 헤, 하고 바보처럼 웃었다. “오빠도 먹을래?” 여자가 봉지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너나 많이 처먹어, 돼지야.”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남자의 눈빛은 더없이 다정했다. 그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루한 주말 오후.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특별한 이벤트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여자가 불쑥 남자를 불렀다. 남자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왜.” 여자는 남자의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왜 맨날 똑같아?” 여자의 뜬금없는 질문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똑같아.” “데이트 말이야. 영화 보고, 밥 먹고, 카페 가고. 맨날 똑같잖아.” 여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뭐, 번지점프라도 할까?” 남자의 비아냥거림에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헐, 대박. 오빠, 우리 번지점프 하러 갈까?” 여자는 신이 나서 남자의 팔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남자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쳤냐? 내가 왜 그딴 걸 해.” 남자의 단호한 거절에도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 왜애. 재밌을 것 같은데. 응? 가자, 오빠. 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결국 두 사람은 번지점프 대신 놀이공원에 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며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지르고, 귀신의 집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고, 회전목마를 타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해가 저물고 놀이공원에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색색의 불빛으로 물든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빠.”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 고마워.”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두 사람의 모습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똑같은 하루’라고 생각했던 날이 ‘특별한 하루’로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특별한 날이라고 해서 두 사람의 대화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남자의 생일. 여자는 며칠 전부터 부산을 떨며 서툰 솜씨로 미역국을 끓이고 케이크를 만들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야, 됐어. 그딴 거 안 해도 돼.” 남자는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여자의 손에서 국자를 빼앗아 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등 뒤에 매달려 앙탈을 부렸다. “아, 왜! 내가 해줄 거야! 오늘은 오빠 생일이잖아!” 결국 남자는 여자에게 떠밀려 식탁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어야만 했다. 잠시 후 여자는 삐뚤빼뚤한 모양의 케이크와 보기만 해도 짠맛이 느껴지는 미역국을 들고 나타났다. “짜잔! 오빠, 생일 축하해!” 여자는 촛불을 붙인 케이크를 내밀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엉망진창인 음식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여자의 진심을 알기에 차마 맛이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는 묵묵히 미역국을 한 숟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젠장, 존나 짜네.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꾸역꾸역 국을 삼켰다. “어때? 맛있어?” 여자가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여자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야, 너 앞으로 요리하지 마라.” 그 말에 여자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맛있다고, 병신아.” 그제야 여자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남자는 촛불을 끄고, 여자의 뺨에 묻은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 제 입으로 가져갔다. “내년에도… 끓여줘라, 미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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