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윤규상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제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류연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그는 밤새 몇 번이나 뒤척였는지 모른다. 결국 그녀의 외출을 허락하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곤히 잠든 그녀가 깨지 않도록, 발소리마저 죽여가며. 그는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줄기가 타는 듯한 속을 조금은 식혀주는 것 같았다. 그는 텅 빈 식탁 의자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곧 그녀가 일어나 외출 준비를 시작할 터였다. 어젯밤, 입에 담배를 문 채로 그녀가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곁을 지키며 감시하듯 지켜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복잡한 심경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났냐.” 부산스럽게 욕실을 들락거리며 외출 준비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척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고맙다’며 제 입술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그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짐짓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은 먹고 가야지. 김 실장이 네가 좋아하는 걸로 차려놨던데.” 그는 그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신경 써서 옷을 고르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여자애 하나 만나는 것뿐인데 뭘 저렇게까지 꾸미나 싶었다. 그는 괜한 심술이 나서 들고 있던 신문을 탁, 소리가 나게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가 뒤에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거울을 통해 놀란 듯 동그래진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 거울 속 자신과 그녀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렇게 꾸미는 건데. 어?” 그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질투심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은은한 샴푸 향과, 그녀의 살냄새가 뒤섞여 그의 이성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거울 속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가지 마. 그냥 오늘 나랑 있자. 응? 내가 더 재밌게 해줄게.” 그의 눈빛은 애원하듯 그러나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을 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돌려세워 자신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과 그녀의 작은 사회생활을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 그 두 가지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알았어. 가. 가는데, 대신.”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주머니에서 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어젯밤에 주었던 검은색 카드 외에, 현금 몇 장을 더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로 맛있는 거 사 먹고 택시 타고 다녀. 푼돈 아낀다고 버스 같은 거 탈 생각하지 말고. 알았냐?”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안 줘도 되는데…”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손바닥 위에 놓인 지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접힌 돈을 쥔 손가락이 살짝 떨렸고, 다른 한 손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소매 끝을 스치듯 잡아챘다. 그녀는 그가 건네준 돈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음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다음엔 ‘정말 이렇게까지 해도 돼?’라는 듯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입 다물고 받기나 해.”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움켜쥐고 억지로 지폐를 쥐여주었다.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구겨지는 지폐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그녀의 손등 위를 제 손으로 덮었다. “내가 주는 돈 받는 게 그렇게 싫어? 아니면 네가 번 돈으로 뭐 대단한 거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려는 듯한 미세한 기미조차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롯이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만 안전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네 용돈이야. 네가 번 돈은… 그냥 통장에 넣어두고 구경이나 해. 알았어?”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예쁘게 꾸민 모습은 분명 보기 좋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다른 놈들도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질투심을 애써 억누르며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 다 돼가네. 이제 슬슬 나가봐야지.” 그의 목소리는 다시 평소의 퉁명스러운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현관으로 걸어가 미리 꺼내두었던 자신의 차 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신발을 신으며 여전히 거실에 서 있는 그녀를 향해 턱짓했다. “뭐해. 안 나오고. 데려다준다니까.”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 익숙한 엔진음이 낮게 울려 퍼졌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아무 말 없이 정면만 응시했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백미러를 통해 그녀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표정. 그는 저 표정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만 나오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 위로 합류했다. 한동안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는 그 침묵을 깨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그 언니라는 여자 말이야. 믿을 만한 사람 맞아?”
그는 질문을 던져놓고 괜히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너무 속 보이는 질문이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운전에만 집중했지만 온 신경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대답에 쏠려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세상 밖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경계했다. 그들이 혹시라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녀를 자신에게서 빼앗아 갈까 봐. 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그는 다시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응, 그 언니… 진짜 엄청 좋은 사람이야.” 그녀는 말하며 눈가를 부드럽게 좁혔다. 마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듯, 어깨에 힘이 스르르 빠졌다. “일할 때도 많이 도와주고… 내가 모르는 거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도 않고 챙겨주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글 돌리며 작게 웃었다. “사람 자체가 되게 따뜻해. 나한테도, 다른 사람한테도.” 잠시, 그녀는 오빠의 표정을 살피듯 시선을 올렸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진짜 좋은 언니야.”
“좋은 사람?” 그는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것을, 이 작은 강아지는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엑셀을 밟아 속도를 조금 더 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네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 보이냐? 그러다 또 뒤통수 맞으려고. 사람 너무 쉽게 믿지 마. 특히, 너처럼 허여멀건 해가지고는.” 그의 말은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노골적인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또다시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더러운 면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할 때 순수하게 반짝이던 그 눈동자. 그는 저 빛을 지켜주고 싶었다. 설령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한이 있더라도.
약속 장소인 백화점 앞에 차를 세우자 그녀가 안전벨트를 풀며 내릴 채비를 했다. 그는 차 시동을 끄지 않은 채,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못을 박듯 말했다. “잊지 마. 한 시간에 한 번씩 연락. 그리고 저녁 6시. 무슨 일 있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전화해. 알았어?” 그는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을 짧고 강하게 머금었다가 놓아주었다. 마치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하는 낙인이라도 찍는 것처럼. 그는 그녀가 차에서 내려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대신 익숙하게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 지금 백화점 앞인데, 사람 좀 붙여. 눈치채지 못하게. 멀리서 지켜만 보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해.”
전화를 끊은 그는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한 시간마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올 것이다. 그리고 6시가 되면 자신이 직접 그녀를 데리러 이곳으로 다시 올 것이다. 그사이의 시간. 그 몇 시간이 그에게는 지독하게도 길게 느껴졌다. 그는 그녀가 없는 빈자리가 이렇게나 크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랐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그녀의 체향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없는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회사에 들어가 밀린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 자리에서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며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화면에는 그녀의 이름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사진 속에는, 그녀와 박수진이라는 여자가 카페에 앉아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케이크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는 사진을 확대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미소. 그는 그 미소를 보며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그는 ‘재밌게 놀아라.’ 하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다섯 시간 남짓. 그는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그녀는 박수진과 함께 천천히 백화점 곳곳을 돌아다녔다. 층마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다르고, 매장마다 다른 향이 스쳐 지나가며 두 사람의 걸음을 가볍게 밀어올렸다. “여기 신상 들어왔대.” 수진이 손짓하며 이끌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얼리 코너로 향했다. 조명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진열대에는 얇은 체인부터 포인트가 강한 펜던트까지 다채로운 목걸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유리 진열장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며 눈을 반짝였다. “와… 예쁘다.” 작게 감탄을 내뱉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이 마음에 든 목걸이를 가리켰다. 수진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거, 은근 분위기 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디자인들도 하나씩 살펴봤다. 빛이 목걸이 표면에 튕겨 올라 작은 반짝임들이 그녀의 눈가에 비쳤다.
백화점 주차장에서 멍하니 시간을 죽이고 있던 그의 휴대폰이 다시 한번 짧게 울렸다. 이번에도 사진이었다. 화면을 켜자 반짝이는 주얼리 쇼케이스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목걸이를 구경하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진열장에 시선을 고정한 모습.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목걸이. 하필이면 목걸이라니. 그는 제 손으로 직접 그녀의 목에 채워주었던 푸른 보석이 박힌 얇은 백금 목걸이를 떠올렸다. 그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다시는 그녀를 잃지 않겠다는 자신의 소유라는 지독한 낙인이자 족쇄였다. 그런데 다른 목걸이라니. 그는 불쾌감에 입맛이 쓰는 것을 느끼며 화면을 꺼버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또다시 그 지긋지긋한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해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짙은 연기가 그의 속처럼 타들어 갔다.
한 시간이 더 흐르고, 약속된 시간이 되자 또다시 사진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 정문 앞에 서 있는 그녀와 박수진이라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뻑뻑한 눈을 비볐다. 그는 ‘거기서 기다려. 5분 안에 간다.’ 하고 짧게 답장을 보낸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6시간. 그녀가 없는 6시간은 6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그는 약속 장소로 차를 몰며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집에 돌아가면 뭘 할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녀와 함께 있을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이 이 지긋지긋한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백화점 앞에 도착하자 멀리서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병신같이. 그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차를 그녀 앞에 세웠다.
“……재밌었냐.”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그가 툭 하고 던진 첫마디였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고 억지로 감정을 억누른 탓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애써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정면만 응시한 채 운전대를 잡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여러 개의 쇼핑백이 거슬렸지만 그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대신 그는 그녀의 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행히, 자신이 채워준 푸른 보석 목걸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는 엑셀을 밟아 차를 출발시키며, 무심한 척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비밀이라던 건 대체 뭔데. 이제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냐?”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무언가 머뭇거리는 듯한 그러면서도 설레는 듯한 미묘한 표정.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라디오를 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그 침묵을 메웠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 그녀가 마침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그는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제 무릎 위에 놓인 쇼핑백 중 가장 작은 것을 만지작거리며 수줍은 듯이 말했다. “이거… 오빠 선물이야. 내 첫 월급으로… 사는 거야.” 그녀는 쇼핑백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거… 잘 몰라서 수진이 언니랑 간 거야.” 그녀는 말하면서 양손을 모으듯 꼬물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언니는 남자친구도 있고… 나보다 이런 거 훨씬 잘 아니까.” 설명하면서도, 자꾸만 남자의 눈치를 보듯 조심스레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피했다. “오빠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 마지막 말이 새어 나오는 순간, 그녀의 귀끝이 조용히 붉어졌다.
자동차는 어느새 익숙한 아파트 단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귀끝까지 붉게 물들인 채, 제 눈치를 살피며 작은 상자를 내미는 모습. 윤규상은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쿵, 하고 세차게 울리는 소리가 제 귓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차를 지정된 주차 공간에 세우고 시동을 껐다. 정적이 내려앉은 차 안. 그는 그녀가 내민 작은 상자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감.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은색 메탈 시계가 들어 있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었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광택과 세련된 디자인이 한눈에 봐도 그의 취향을 저격한 물건이었다. 그는 잠시 말을 잃고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진이 언니. 그 여자와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이걸 골랐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자신의 취향을 고민하고 남자친구 있는 여자의 조언까지 들어가며 신중하게 골랐을 그 마음이 묵직한 쇠뭉치가 되어 그의 가슴을 툭, 하고 건드렸다. 그는 목이 메는 듯한 감각에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해야 했다. “…….” 고작 이런 걸 사주려고. 그는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젠장. 또 저 작은 것에게 지고 말았다.
그는 한참 만에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마음에 들어.” 평소의 그답지 않게, 힘없이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그는 상자를 닫고 뒷자석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댔다. 가까이에서 마주 본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음에 든다고. 존나게.” 그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고맙다. 류연.”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던 손을 내려 대신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제 손목에 차고 있던 낡은 시계를 풀었다. 꽤 오랫동안 차고 다녀 가죽 밴드가 닳아빠진 시계였다. 그는 그것을 뒷좌석으로 던져버리고 그녀가 선물해준 새 시계를 제 손목에 채웠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그의 피부에 와 닿았다. 그는 시계를 찬 제 손목을 들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아이처럼 조금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 잘 어울리냐?”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응. 엄청 잘 어울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손목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단정하게 채워져 있는 시계를 한참 바라보더니, 마치 그 시계가 갑자기 더 멋있어 보이기라도 한 듯, 입술이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한 듯, 그녀는 활짝,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그녀의 볼에는 은은한 홍조가 돌고, 어깨까지 가볍게 들썩일 만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칭찬 한마디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이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발갛게 상기된 얼굴. 그는 그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붉어진 귀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이것만 차고 다녀야겠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울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자신과 똑같은 모양의 심플한 은색 반지가 두 사람의 손가락 위에서 나란히 빛났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그녀의 반지 위에도 짧게 입을 맞추었다. “가자.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어야지. 오늘 하루 종일 밖에서 고생했는데.”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젠틀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익숙한 현관문으로 향했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집 안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김 실장이 그의 말대로,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저녁 식탁을 가득 채워놓은 모양이었다. 그는 신발을 벗으며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씻어. 밥은 내가 차려놓을 테니까.” 그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떠밀어 욕실로 보내고는 자신은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릇을 꺼내고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식탁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그녀가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이미 식탁에 모든 음식을 차려놓고 의자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손짓으로 그녀를 불러,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그녀의 밥그릇 위로 가장 맛있어 보이는 반찬들을 가득 올려주었다. “많이 먹어. 오늘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힘들었을 거 아니야.” 그는 턱을 괸 채, 맛있게 밥을 먹는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작은 입, 복스럽게 부풀어 오르는 뺨.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문득, 이런 평범한 일상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수저를 들어,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언니라는 여자랑은 주로 무슨 얘기 했는데. 혹시라도 내 욕 한 건 아니지?” 그는 짐짓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작은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도시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 불빛들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며 이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일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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