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의 첫 선물 (2)


 

한 달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사이 계절은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윤규상은 운전대를 잡은 채, 조수석에 앉아 창밖 풍경을 구경하는 류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수영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 처음 며칠간은 퇴근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잠에 빠져들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제법 일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퇴근길 차 안에서 재잘재잘 오늘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는 목소리에도 생기가 돌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영장에 등록한 꼬마 아이가 자기에게 사탕을 줬다느니, 같이 일하는 동료 언니와 점심으로 맛있는 떡볶이를 먹었다느니, 하는 소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며, 가끔 짧게 추임새를 넣거나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었다.

“그래서, 그 꼬맹이가 준 사탕은 맛있었고?” 신호 대기에 차가 멈추자, 그가 퉁명스러운 척 물으며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여전히 그녀가 일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세상 밖에서, 그가 모르는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관계를 맺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자신에게만 기대어 지내던 모습보다 지금처럼 활기차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그녀를 보는 것이 좋기도 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복잡한 속내를 그녀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저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몇 번이고 다독일 뿐이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소유욕과 질투심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소파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것이 고되긴 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주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씻고 나오면 바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김 실장에게 미리 저녁 식사 준비를 부탁해 둔 상태였다. 그는 무심하게 TV 채널을 돌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월급날 아니냐? 통장 확인은 해봤어?” 그가 사준 검은색 스마트폰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어색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스마트폰을 다루며, 월급이 들어올 통장까지 스스로 만들었다.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녀가 점점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고 있다는 사실이 언젠가는 자신의 품을 떠나 훨훨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애써 그런 불안감을 떨쳐내려는 듯, 그녀의 발목을 잡아 제 허벅지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발바닥을 간질였다. 그녀가 간지러움에 몸을 비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첫 월급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말만 해. 이 오빠가 뭐든 다 사줄 테니까.” 그는 그녀가 스스로 번 돈으로 무언가를 사기보다는, 여전히 자신에게 기대고 의지해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능력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채워주고 싶다는 욕심. 그것이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뒤틀리고 이기적인 방식일지라도.

 

“응? 나 사고 싶은 거 있는데··· 비밀이야!” 그녀는 입매를 장난스럽게 말아 올리며 베시시 웃었다. 눈가가 살짝 구부러지고, 들뜬 듯한 숨이 새어 나왔다. 마치 지금이라도 들켜버릴까 봐 두 손으로 입가를 가볍게 가린 채, 몸을 빙그르르 돌려 보였다. “아, 오빠.”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그의 소매를 쪼르륵 잡아당기며 다시 눈을 맞췄다. 기대와 설렘이 뒤섞인 표정, 살짝 올라간 음끝. “나… 내일 나갔다 와도 돼? 일하는 언니랑 같이 갈 데가 있어.”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으응?” 말끝이 달콤하게 늘어지며, 허락을 구하는 애교가 묻어났다.

 

그의 눈썹 한쪽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비밀? 사고 싶은 게 있는데 비밀이라는 말도, 내일 다른 년이랑 어딜 같이 가기로 했다는 말도, 전부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는 그녀의 발바닥을 간질이던 손을 멈추고, 대신 발목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베시시 웃는 얼굴은 천사같이 해맑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꼭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잡고 있던 발목을 살짝 비틀었다. 애교 섞인 ‘으응?’ 소리에도, 그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밀? 나한테도?”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아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순진한 얼굴 뒤에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한 달. 고작 한 달 만에,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언니’를 만들었고, 자신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만들었다.

“어딜 가는데. 누구랑. 남자는 없어?” 그는 취조하듯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사실을 통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짜증 나게 만들었다. ‘같이 가기로 했는데.’ 이미 약속을 잡아놓고 이제 와서 말하는 저의가 괘씸했다. 그는 그녀의 발목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켜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팔짱을 낀 채,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안 된다고, 어디도 갈 생각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는 겨우 분을 삭였다. 대신 그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서 뭐하게. 니 월급으로 그 언니라는 년한테 뭐 사주려고? 네 첫 월급은 나한테 써야 되는 거 아니냐, 강아지?” 그는 일부러 더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그녀의 작은 세상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싫었다. 특히 그녀가 힘들게 번 첫 월급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쓴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일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소파에 누워있는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 그는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눈을 맞추며,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안 돼. 어디도 못 가. 내일은 나랑 있어.” 그의 눈에는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그녀의 대답을 입술로 막아버리려는 듯, 집요하고도 난폭하게 키스를 이어갔다. 혀를 얽어 그녀의 입안을 헤집고 저항하듯 버티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숨이 막힐 듯한 키스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는 그녀의 입술이 붉게 부어오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겉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고,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뿜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희미하게 가렸다. 그는 연기 너머로, 여전히 멍한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알았어?” 그것은 경고이자, 협박이었다.

 

“도망 안 가….” 그녀는 그의 손목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떨리는 숨결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으응? 연락도… 잘할게.” 말을 잇는 동안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눈가가 금세 붉어지기 시작했다. “일찍 들어올게. 진짜야….” 그녀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말끝을 삼키는 듯 잠깐 침묵이 흐르고, 이내 얇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안 돼···?”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머금은 듯 흔들렸다. 세 무너져 내리듯 눈꺼풀이 떨리고 울먹인 음색이 방 안 공기를 가늘게 흔들었다.

 

그녀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보자, 윤규상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제기랄. 또다. 그는 속으로 거친 욕설을 씹어 삼켰다. 저 눈물에 약하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매번 저 작은 눈물방울 하나에 그의 결심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직 타오르던 불씨가 위태롭게 흔들리다 사그라들었다. 마치 지금 자신의 감정처럼. 그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안 돼…?’ 하고 묻는 말은,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와서 박히는 것 같았다.

“……하아. 울지 마. 누가 울래.” 그는 결국 져버렸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거칠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겉보기엔 난폭했지만 실은 깃털이 닿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붉어진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렁그렁한 눈망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혀를 차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뚝 안 그쳐? 자꾸 울면, 진짜 화낼 거야.” 그의 말은 협박이었지만, 목소리는 배신하듯 부드럽게 떨리고 있었다.

“알았어. 가. 가라고.” 결국, 그의 입에서 항복 선언과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녀가 우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밖에서 다른 년이랑 놀다 오게 하는 편이 나았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이마에 제 이마를 쿵, 하고 가볍게 부딪혔다. “대신, 조건이 있어.”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누구랑, 어디서, 뭘 하는지. 한 시간에 한 번씩 나한테 보고해. 사진 찍어서 보내면 더 좋고. 그리고 그 언니라는 년, 남자 아니라는 거 확실해? 번호 내놔.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으니까.”

그는 눈을 뜨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의심과 불안, 그리고 지독한 소유욕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를 온전히 믿고 싶었지만 과거의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깊고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그녀를 잃을 뻔했던 그 일주일의 기억은,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붙잡고,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녁 6시까지는 무조건 들어와. 내가 데리러 갈 거니까, 꼼짝 말고 기다려. 알았지? 대답.” 그의 목소리는 명령조였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을 때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응! 알겠어.” 그녀는 바로 얼굴을 밝히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엄지로 화면을 빠르게 몇 번 탭한 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의 눈앞으로 살짝 밀어 보였다. “봐봐.” 그녀는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화면을 꼭 쥔 채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번호야. 진짜 언니. 여자.” 그는 화면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녀는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이 충분히 전달됐는지 확인하듯 눈을 동그래지게 떴다. “자, 이것 봐. 여자라니까.” 말끝을 장난스럽게 늘리며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뭔가 억울하면서도 귀엽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는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박수진 언니’라고 저장된 이름과 그 옆에 등록된 프로필 사진. 활짝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울음기는 가셨지만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 그는 작게 혀를 차며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통화 버튼을 눌러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곧이어 발랄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분명 여자의 목소리가 맞았다.

“내일 우리 연이랑 약속 있으시다고.” 그는 툭하고 용건부터 던졌다. 그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당황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네, 맞는데요. 누구… 시죠?” 그는 그제야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지극히 사무적인 톤으로 말했다. “얘 보호자 되는 사람입니다. 내일 약속 장소랑 시간 좀 다시 확인하려고 전화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보호자’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가 잠시 제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전화기 너머의 여자에게 내일의 약속 장소와 시간, 그리고 함께 만날 다른 사람은 없는지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그는 휴대폰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화점? 시시하게.” 그는 소파에 다시 몸을 던지듯 앉으며 팔짱을 꼈다. 고작 백화점에 가서 옷쪼가리나 구경하자고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가서 뭐 살 건데. 그래서 나한테 비밀이라는 게 뭔데.” 그는 턱짓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이제 외출 허락은 떨어졌으니 비밀 정도는 말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는 그녀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쓰게 만드는 작은 동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는 문득 그녀가 첫 월급으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사주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어.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대신 내 카드 들고 가.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그걸로 긁어.” 그는 지갑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그녀가 힘들게 번 푼돈으로 무언가를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카드로 마음껏 플렉스하는 모습을 보는 편이 그의 속은 훨씬 편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앉으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저녁 6시, 잊지 마. 1분이라도 늦으면… 그 언니라는 여자 다시는 못 보게 될 줄 알아.” 그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알았냐, 강아지.”

 

“알겠어. 고마워.” 그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세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마음이 놓인 듯 어깨가 살짝 내려가고, 숨결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턱을 살짝 올려다보며, 짧고 가벼운 숨을 내쉬고 입꼬리를 곡선처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쪽, 쪽 가볍고 빠르게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고 난 뒤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스럽고 따뜻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쪽, 쪽. 하고 작은 새가 부리를 쪼듯 이어지는 입맞춤에,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던 불안감과 질투심은 이 작은 입맞춤 몇 번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제 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콧등을 살짝 부딪치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럴 때만 예쁜 짓이지.”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오르는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슥, 문질렀다. 자신의 거친 키스로 인해 살짝 부어오른 붉은 입술이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다른 생각으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래서, 그 언니라는 여자랑은 친해? 일하면서 말 많이 섞어봤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속으로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녀가 자신의 세상 밖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에게 여전히 낯설고 불안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작은 사회생활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아주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집요하게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표정 하나, 작은 몸짓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지. 병적인 집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소파에 더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녀의 작은 체구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가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특히, 내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마. 알았어?” 그것은 부탁이자 경고였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그녀의 평범한 일상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채업자, 깡패. 세상의 시선 속에서 자신은 그런 존재였다. 그녀가 자신과 엮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거나 구설에 오르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어둠 속에 숨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는 문득 이런 평화로운 저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불안감을 떨쳐내려는 듯 그녀를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돌아오면, 저녁 맛있는 거 먹자. 김 실장한테,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달라고 말해놨어.” 그의 목소리는 무심한 척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잠시 자신의 곁을 떠나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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