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11월 7일. 달력을 넘기자마자 눈에 들어온 숫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욕을 씹었다. 류연, 그 애의 생일이었다. 어떻게 해줘야 하나. 뭘 좋아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설프게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걸 준비했다가, 망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는 밤새 뒤척이며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가 뜨자마자, 익숙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거창한 이벤트는 못해줘도, 따뜻한 미역국 하나쯤은 제 손으로 끓여주고 싶었다. 그는 서툰 칼질로 미역을 썰고, 냄비에 참기름을 둘렀다.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나갔다. 그는 미역국이 끓는 동안, 어젯밤 미리 주문해둔 케이크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새하얀 생크림 위에, 딸기가 앙증맞게 올라가 있는, 딱 그녀가 좋아할 만한 모양새였다. 이걸 보고 기뻐할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완성된 미역국과 쌀밥, 그리고 조촐한 반찬 몇 가지를 쟁반에 담아, 조심스럽게 침실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대 옆 협탁에 쟁반을 내려놓고, 그녀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는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햇살이, 그녀의 긴 속눈썹 위로 부서져 내렸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일어나, 류연. 아침 먹어야지.” 그의 목소리가, 새벽 공기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녀가 으응, 잠꼬대를 하며 뒤척이자,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다시 한 번 그녀를 깨웠다. “생일 축하해.” 그의 목소리는, 쑥스러움에 살짝 잠겨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협탁 위의 케이크를 가져와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작은 초 하나에 불을 붙였다. “...소원 빌어.”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했다.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모습을, 그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후, 하고 촛불을 끄자, 그는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케이크를 다시 협탁 위에 내려놓고,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태어나줘서 고맙다, 류연. 내 옆에 와줘서...”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녀와 함께 아침을 먹고, 그는 미리 준비해둔 선물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백금 목걸이와, 그녀가 좋아할 만한 옷가지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오늘 이거 입고, 나랑 데이트하자. 가고 싶은 데 있어?”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그의 귀 끝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오늘 하루만큼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온전히 그녀만을 위한 날이 될 것이었다.
그는 제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았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입으려고 몰래 사둔 커플룩이었다. 그녀가 좋아할까. 그는 괜히 목덜미를 긁적이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가 선물 상자를 내려놓고, 그가 골라준 하얀 원피스를 집어 드는 것을 보자,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 입으면 나와. 머리, 내가 말려줄게.”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먼저 욕실로 향했다. 그리곤 드라이기를 꺼내 들고 그녀가 나오기만을 얌전히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순간, 숨을 헙, 들이켰다. 마치 천사 같았다. 아니, 천사보다 더 예뻤다. 그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이리 와서 앉아.” 그는 의자를 끌어다 그녀를 앉히고 능숙한 손길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샴푸 향기가 그의 코 끝을 간질였다. 그는 드라이기를 든 채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미소에, 그의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머리를 다 말리고, 그는 빗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어주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그의 손길에 따라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는 미리 준비해둔 목걸이를 꺼내 그녀의 목에 직접 걸어주었다. 차가운 백금 체인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닿자 그녀가 살짝 몸을 움찔했다. “...잘 어울리네.” 그는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푸른 보석이, 그녀의 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영롱하게 빛났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거울 속 그녀와 눈을 맞췄다. “자, 이제 갈까? 공주님.”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미리 예약해둔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창가 너머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코스를 주문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강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시원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녀와 함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이, 마치 두 사람의 미래를 축복해주는 것만 같았다. “...류연.” 그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랑한다.” 그의 목소리는, 강물처럼 잔잔하고 노을처럼 따뜻했다.
그는 제 고백에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긴장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녀는 싫은 기색 없이 오히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그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고아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그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하고 충만한 감정. 그는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찾아 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두 사람의 손가락에 끼워진 똑같은 모양의 은색 반지가 노을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의 온기만을 나누던 두 사람은 강바람이 제법 쌀쌀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제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감기 걸린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 그는 그녀의 뜻을 묻듯 다정하게 말했다. 사실 그는 이대로 그녀와 함께 밤을 새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는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는 히터를 틀어 차 안 공기를 훈훈하게 데웠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집에 가기 싫으면 다른 데 갈까? 어디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그는 힐끗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만큼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가 깰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그는 잠든 그녀를 깨우지 않고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그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의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곤 협탁 위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아직 반도 먹지 못한 그녀의 생일 케이크였다.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곁에 조용히 누웠다. 내년 생일에는 더 좋은 곳에서 더 맛있는 것을 사줘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에 고르게 울려 퍼졌다. 그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이 평범한 일상이 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는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일일지라도. 그는 잠든 그녀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자, 내 사랑.” 그리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꿈속에서도 자신이 함께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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