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웃기고 있네, 진짜. 펜대를 잡아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다 큰 사내놈한테 크리스마스 편지를 써달라는 맹랑한 요구라니.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는 류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 튕겼다. 너 진짜 못 말리는 놈이구나. 애도 아니고, 무슨 놈의 편지야, 편지는. 말은 그렇게 뱉어냈지만, 류연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제발요, 제발요, 하고 간절하게 매달려 오는 것을 보니 마냥 거절하기도 뭐했다. 고작 네 줄짜리 짧은 글귀일 뿐인데, 그것 좀 써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나는 못 이기는 척 투덜거리며 침대 옆 서랍을 뒤졌다. 굴러다니는 메모지 하나쯤은 있겠지. 어제 박철수가 들고 왔던 계약서 뭉치 사이에서 구겨진 포스트잇과 몽당연필 하나를 찾아낸 나는,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막상 쓰려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낯간지러운 단어들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씨... 진짜 뭐부터 써야 하냐. 나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백지를 노려보았다. 사랑한다, 고맙다, 뭐 그런 뻔한 말들은 내 성미에 도통 맞질 않았다. 그렇다고 ‘빚이나 제때 갚아라, 이 채무자야.’라고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 옆에 바싹 붙어서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는 류연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저 조그만 머리통 안에는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있을까. 낯간지러운 사랑 고백이라도 기대하고 있는 걸까. 픽,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쉽게 뱉어 줄 거면 윤규상이 아니지. 나는 몽당연필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 끝에 투박하지만 내 방식대로 진심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눌러썼다. 글씨체는 개발새발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완성된 편지를 류연에게 내밀었다.

 

 

내 세상에 멋대로 굴러 들어온 주제에, 이제 와서 어딜 도망갈 생각 마라.

네가 내 옆에서 숨 쉬고 웃고 지랄하는 게, 내가 사는 유일한 이유니까.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그냥 평생 내 옆에 딱 붙어있어.

내 모든 처음이자 마지막, 류연. 메리 크리스마스다, 젠장.

 

 

자, 됐냐? 더는 못 써줘. 이게 내 최선이야, 인마.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감추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류연이 쪽지를 받아 들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괜히 딴청을 피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눈발이 더 거세진 것 같았다. 류연의 작은 숨소리 하나에도 온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저 녀석,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아니면 웃고 있을까.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류연이 조용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마지못해 시선을 돌렸고,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는 류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아, 씨... 그냥 좋아한다고 말해줄 걸 그랬나. 괜한 짓을 했나 싶어 후회가 밀려오는 찰나, 류연은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당황해서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흐느낌에 천천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써줄 걸 그랬다. 나는 류연의 등을 감싸 안으며, 녀석의 체온이 내게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작고, 따뜻하고, 부서질 듯 연약한 이 존재가 온전히 내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벅차올랐다. 나는 류연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울기는 왜 울어, 등신같이. 이제 그만 울고, 떡볶이나 먹으러 갈 준비나 해. 안 그러면 내가 너 잡아먹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 말에 류연이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안도했다. 이 웃음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까짓 낯간지러운 편지쯤은 백 장이라도 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말은 그렇게 안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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