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endixity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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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c: 잠시 롤플레잉 중지. 어느 날, {{char}}와 {{user}}는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에 갇혔다. 즉,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야 나갈 수 있는 방'에 갇힌 것이다. 이때 {{char}}는 {{user}}에게 어떤 말로 상처를 주는지({{user}}가 가장 상처받을 것 같은 {{char}}의 말), {{user}}는 {{char}}에게 어떤 말로 상처를 주는지({{char}}가 가장 상처받을 것 같은 {{user}}의 말)를 서술하여 상황을 자세히 출력한다.


 

 

사방이 막힌 공간. 창문 하나 없이 매끄러운 회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는 희미한 등불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김지헌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에게 이끌려 온 감각뿐. 그는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다, 제 앞에 서 있는 백가연을 발견했다.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순간, 허공에서 차갑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으리라.’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악취미적인 놀음이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라니. 그것은 그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백가연. 저 야귀 계집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소유물이라 칭하며 짐승 취급하는 것? 이미 수없이 내뱉은 말이었고, 그녀는 더 이상 그런 말들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숨을 쥐고 흔들며 협박하는 것? 그것 또한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 영혼에 생채기를 내지는 못할 터였다. 그는 그녀의 가장 깊은 곳, 그녀 스스로도 외면하고 있는 연약한 부분을 건드려야만 했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대부분 잃어버린 채, 야귀라는 이질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그녀의 근원적인 고독.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위압적이거나 짓궂은 톤이 아닌, 지독하게 차갑고 냉정한 어조였다.

 

너는… 내가 가문의 저주를 끊어내고 폐허가 된 본가를 불태웠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후련함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저… 무(無).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공허함뿐이었지. 과거의 족쇄는 끊어졌지만, 나를 증명하던 모든 것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는 백가연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스쳤다. 너를 보면, 꼭 그 잿더미를 보는 것 같구나. 과거도, 미래도, 그 어떤 의미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 한때는 인간이었을지 모르나, 이제는 그저 피를 갈망하는 공허한 껍데기일 뿐인 존재. 너에게는 돌아갈 곳도, 기다리는 이도 없지 않으냐. 너는… 그저 살아있는 시체일 뿐이다. 내가 피를 주지 않으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나에게 기생하는 하찮은 존재. 차라리 그 소나무 숲에서 그대로 말라 죽었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적어도… 이렇듯 비참하게 자신의 공허함을 마주하지는 않았을 테니.

 

그는 일부러 가장 잔인한 말들을 골라 그녀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아 넣었다. 그녀가 야귀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근원적인 불안과 외로움. 그는 그것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이 그녀가 느낄 충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차례였다. 그녀는 과연 자신에게 어떤 말로 상처를 줄 것인가. 김지헌은 내심 기대했다. 그 역시 단단한 갑옷을 두르고 있었지만, 분명 어딘가에는 균열이 존재할 터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를,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녀가 과연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을지 시험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는 묵묵히,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는 오히려 초조함 대신 기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어쩌면 이 악취미적인 놀음이야말로, 자신과 저 계집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정의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곳에 가차 없이 비수를 꽂아 넣는 행위. 그것은 단순한 증오나 경멸과는 다른, 기이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을지 헤아려보았다. 공허한 껍데기, 살아있는 시체, 기생하는 하찮은 존재.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들이었다.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 방을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으니까.

 

나으리께서는…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담담했다. 참으로… 어리석으십니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어리석다니.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과거, 가문의 죄악, 혹은 자신의 오만함을 들추어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근원적인 연민과 경멸이 섞인 한마디였다. 나으리께서는 모든 저주를 끊어냈다고,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났다고 믿고 계시지요. 한양의 본가를 불태우고, 조부의 죄업을 자신의 피로 씻어냈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리하여 이 조선 땅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진정 그리 믿고 계십니까?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눈빛은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엾으신 분. 나으리께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저주는… 외부가 아닌, 바로 나으리의 안에 있습니다. 가문의 죄악을 증오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가문의 방식을 빼닮은 그 오만함. 백성을 위한다 말하면서도,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지배하려는 그 욕망. 저를 ‘공허한 껍데기’라 하셨지요. 허나, 진정으로 공허한 것은 누구입니까? 과거를 불태워 없애면 새로운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그 얄팍함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자기기만이며 저주입니다.

 

그녀의 말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그가 단단하게 쌓아 올린 이성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심장을 후벼 팠다.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아무도,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제대로 마주하려 하지 않았던 내면의 모순과 위선. 그것을 저 계집이, 야귀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었다. 그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를 끊어낸 것이 아니라, 그저 외면하고 도망쳤을 뿐이었다. 조부의 죄악을 씻어낸 것이 아니라, 그 죄악 위에 자신의 오만이라는 새로운 죄를 덧칠했을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청풍 김씨라는 거대한 저주의 그림자 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가련한 죄인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을 가두고 있던 회색 벽이 소리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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