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리기 시합
“알겠다.”
어느 화창한 봄날, 관아 뒤뜰은 쓸데없이 활기찼다. 평소라면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어야 할 현령과 그의 그림자 같은 여인이 마주 서 있었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된 내기였다. “그리 자신만만하다면 겨뤄보면 될 일이 아니냐”는 김지헌의 도발에 백가연이 순순히 응한 결과였다. 누가 더 빠른가. 인간과 야귀의 자존심을 건, 실로 어처구니없는 달리기 시합이었다. 김지헌은 관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리띠를 고쳐 매며 씩 웃었다. 그는 자신의 특기 중 하나가 달리기임을 굳이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야귀의 신체 능력이 인간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사실쯤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구쳤다. 어쩌면 그녀 앞에서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는 유치한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준비되었느냐?” 그의 물음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관아의 나졸들과 하인들이 멀찍이서 숨을 죽인 채 이 기이한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김지헌이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를 가리켰다. “저 소나무를 찍고 먼저 돌아오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벌칙은… 이긴 자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이미 그는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헉헉대며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쾌감에 젖었다. 이내 그가 땅바닥에 선을 그었다. “내가 셋을 세면 출발한다.”
“하나, 둘… 셋!” 마지막 구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지헌은 박차고 나갔다. 흙먼지가 그의 발치에서 피어올랐다. 예상대로였다. 초반 속도는 그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눈앞의 소나무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백가연은 아직 출발선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역시 야귀라 한들 단거리에서는 인간의 폭발적인 순발력을 따라오지 못하는구나. 승리를 확신한 그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목표 지점은 코앞이었다. 그는 힘껏 손을 뻗어 거친 소나무 껍질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만치 뒤처져 있던 백가연이 어느새 자신의 바로 뒤까지 쫓아온 것이다. 그녀의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땅을 박차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끄러지듯 공간을 건너뛰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와 달리 붉은 기운이 감돌았고,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김지헌의 뇌리에 경종이 울렸다. 덫에 걸렸다. 그녀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본 백가연이 얄밉게 웃으며 속삭였다. “나으리, 이제 시작입니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김지헌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그는 망연자실한 채,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명백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2. 기억력 대결
어느 나른한 오후, 연이은 사건들로 긴장했던 금천현에 모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김지헌은 관아의 업무를 잠시 뒤로하고, 내아의 툇마루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백가연이 조용히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료함이 공기 중에 내려앉을 무렵, 김지헌은 문득 짓궂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부채를 접으며 백가연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연아, 나와 내기를 하나 하자꾸나.”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백가연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기억력 겨루기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일들을 순서대로 읊는 거지. 먼저 막히거나 틀리는 쪽이 지는 것이다. 어떠냐, 해볼 테냐?”
백가연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승부욕이 어리는 것을 본 김지헌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그럼 소원 들어주기로 할까. 이긴 자는 진 자에게 어떤 소원이든 빌 수 있다.” 그는 이 게임을 통해 그녀의 기억 속에 얼마나 자신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또한, 그녀가 인간 시절의 기억을 대부분 잃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내기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비상한 기억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그는 이 내기에서 질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임은 김지헌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소나무 숲에서 피를 갈구하며 쓰러져 있던 그녀를 처음 발견했던 날의 풍경을 세세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날씨, 바람의 냄새, 그녀의 창백했던 얼굴과 떨리던 속눈썹까지. 그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백가연은 그의 기억력에 감탄하면서도, 지지 않으려는 듯 그날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김지헌의 차가운 손길에 대해 읊었다. 게임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無傷之屍 사건의 단서들, 야귀와의 전투,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밤, 저잣거리에서의 아찔한 유희, 그리고 은방에서의 맹세까지. 두 사람은 마치 한 편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듯 과거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추어 나갔다. 김지헌은 그녀가 의외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는 더욱 교묘하고 사소한 것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날 내가 입었던 도포의 옷고름 색은 무엇이었지?” “은방 주인의 왼쪽 눈 밑에 작은 흉터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느냐?”
결국 승부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갈렸다. 김지헌이 며칠 전 아침 식사로 나왔던 반찬의 가짓수를 물었을 때, 백가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바로 그 찰나의 망설임을 김지헌은 놓치지 않았다. “네 가지였지. 젓갈과 나물, 그리고 김치와 장조림. 넌 나물을 남겼고.” 그의 완벽한 기억력 앞에 백가연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김지헌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패배를 인정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이겼으니, 이제 내 소원을 들어야겠지?” 그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소원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 밤, 날이 저물면… 다시 한번 내게 너의 모든 것을 다오. 그때는 내가 졌으니, 이번에는 내가 이길 차례다.” 그의 목소리는 승자의 여유와 함께, 그녀를 향한 지독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3. 숨은 그림 찾기
어느 화창한 봄날, 길었던 겨울의 잔재가 마침내 녹아내리고 관아 뒤뜰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며칠간 이어진 고된 업무에 지친 김지헌은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자 백가연을 데리고 후원으로 나섰다. 볕이 잘 드는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향긋한 매화차를 앞에 둔 채 그는 문득 짓궂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화첩(畫帖) 한 권을 꺼내 펼쳤다. 그것은 금천현에서 가장 이름난 화원(畫員)이 그린,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산수화였다.
“가연아.”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 그림이 무척이나 아름답지 않으냐. 허나 이 안에는 화원이 숨겨둔 작은 장난이 있단다. 이 그림 어딘가에… 아주 작은 크기의 호랑나비 한 마리가 숨어있다고 하더구나. 내기와 유희를 좋아하는 이 화원의 짓궂은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지.” 그는 화첩을 탁자 위에 펼쳐놓으며 그녀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여, 나와 내기를 하나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나와 너, 둘 중 누가 먼저 이 그림 속에 숨은 나비를 찾아내는지 말이다.”
그의 제안은 즉흥적이었으나, 그 안에는 명백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는 백가연의 뛰어난 시각과 집중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야귀로서의 그녀의 능력이 인간을 얼마나 뛰어넘는지, 그리고 그 능력을 이런 사소한 유희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궁금했다. “진 쪽은 이긴 쪽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어떤 소원이든 말이다.”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것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주도권을 건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었다. 백가연은 그의 도전을 말없이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복잡한 산수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김지헌이 우세한 듯 보였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과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림의 구석구석을 체계적으로 훑어 나갔다. 험준한 바위틈, 빽빽한 소나무 숲,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수 뒤편까지. 그는 인간이 숨길 법한 모든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며 범위를 좁혀나갔다. 그의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고,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반면 백가연은 그저 묵묵히 그림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는 김지헌처럼 부산스럽게 시선을 옮기지도, 손가락으로 그림을 짚어가지도 않았다. 그저 깊고 고요한 눈으로, 그림 전체를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김지헌은 속으로 그녀의 방식이 비효율적이라 생각하며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자신감은 초조함으로 바뀌어갔다. 그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고, 나비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백가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긴 손가락을 들어, 그림의 한 부분을 조용히 가리켰다. 김지헌의 시선이 그곳을 따라갔다. 그곳은… 그림의 가장 중앙, 가장 화려하게 피어난 모란꽃의 붉은 꽃잎 바로 위였다. 마치 꽃의 일부인 양,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작은 호랑나비.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꽃잎의 무늬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위장이었다. 김지헌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놓쳤던, 가장 명백하고도 대담한 장소를 꿰뚫어 본 그녀의 직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졌구나. 그래, 네가 이겼다. 나의 패배다. 자, 소원을 말해보거라. 내 약조대로 무엇이든 들어주마.” 그는 완벽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그녀가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기다렸다.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띤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며, 그는 앞으로의 밤이 꽤나 길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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