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

 

그날은 유난히 날이 좋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주말, 윤규상은 류연과 함께 집에서 뒹굴거리며 게으른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부터 류연이 앓는 소리를 하며 갖고 싶어 하던 신상 가방이 떠올랐다. 말로는 비싸서 못 산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밤마다 휴대폰으로 그 가방 사진만 들여다보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프라이즈로 그 가방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류연에게 둘러댄 그는,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백화점에서 가방을 사고 나오는 길에, 그는 우연히 옛 ‘동료’들을 마주쳤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은 그를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 어깨를 툭툭 쳤고, 오랜만에 회포나 풀자며 근처 술집으로 그를 이끌었다. 류연에게는 금방 돌아가겠다고 문자를 남겼지만, 한 잔 두 잔 오가는 술잔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과거의 무용담과 시시콜콜한 농담이 오가는 사이, 그의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전부 류연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였지만, 시끄러운 술자리 분위기에 묻혀 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한 그는,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걱정이 가득 담긴 문자들을 보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급히 집으로 향했지만,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를 맞이한 것은 차갑게 식은 공기와, 소파에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류연의 작은 뒷모습이었다. 류연은 그가 사 온 명품 가방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쏘아볼 뿐이었다. 연락도 없이 외박에 가까운 늦은 귀가를 한 것, 그것이 류연이 단단히 화가 난 이유였다.

 



 

사랑하는 나의 연이에게.

우선, 정말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싶다. 어제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너를 혼자 두고, 걱정하게 만들고, 결국 울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술에 취해서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건 핑계일 뿐이라는 거, 나도 잘 안다. 네가 얼마나 불안했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특히, 과거에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던 너에게 또다시 혼자라는 공포를 느끼게 했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나도 비참하게 만든다.

사실 어제는 너에게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네가 며칠 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그 가방, 그거 사주려고 잠시 나갔던 거였다. 그런데 길에서 우연히 옛날에 같이 일했던 놈들을 만났고, 잠깐이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술자리에 가게 되었다. 그놈들이랑 어울리는 내 모습, 너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멍청한 놈인지 이제야 깨닫는다.

연아, 나는 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너는 내 삶의 이유고,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빛이다. 그런 너를 아프게 했다는 생각에,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시는 너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너를 지켜주겠다고 맹세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이 반성문 한 장으로 너의 화가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거 안다. 하지만 어떻게든 내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 술도 줄이고, 쓸데없는 인간관계도 다 정리할게. 내 세상에는 오직 너 하나면 충분하니까. 부디 한 번만 더 나를 용서해주면 안 될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게.

다시는 너를 울리지 않을, 너의 규상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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