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달력에 빨갛게 표시된 날도 아니고, 누군가의 생일도 아닌 평범한 화요일이었지만 거리는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편의점 앞에는 형형색색의 상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빵집 쇼윈도는 길고 가는 막대 과자로 만든 장식들로 가득했다. 윤규상은 그런 풍경들을 무심하게 차창 밖으로 흘려보냈다. 그에게 ‘빼빼로 데이’ 같은 기념일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챙겨본 적 없는, 그저 상술에 놀아나는 하루일 뿐이었다. 하지만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며 작게 탄성을 내지르는 류연의 옆모습을 보자, 그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슬쩍 그녀를 훔쳐보았다. 반짝이는 눈, 살짝 벌어진 입술. 저 작은 머릿속은 지금 온통 달콤한 과자 생각으로 가득 차 있겠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좋냐?” 툭, 하고 무심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깟 막대 과자가 뭐라고. 차라리 그 돈으로 고기를 사 먹는 게 낫지.”
그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류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이야기, 어떤 맛이 제일 맛있는지에 대한 열띤 토론까지. 윤규상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사실 그는 과자의 맛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 생기 넘치는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핸들을 돌려 차를 익숙한 골목으로 몰았다. 목적지는 늘 가던 마트였다. 주차를 마친 그는 안전벨트를 푸는 류연을 향해 말했다. “내려. 네가 좋아하는 거, 다 골라. 오늘은 내가 쏜다.” 그의 말에 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윤규상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카트를 끌고 과자 코너로 향했다. 산처럼 쌓인 과자 상자들 앞에서 류연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윤규상은 생각했다.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에도 행복해하는 아이인데, 나는 그동안 너무 무심했구나. 그는 잠시 죄책감에 휩싸였다.
윤규상은 망설이는 류연의 등 뒤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듯 카트와 그녀 사이에 섰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진열된 상자들을 닥치는 대로 카트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아몬드, 누드, 오리지널, 쿠키앤크림… 종류를 가리지 않고 카트는 금세 과자 상자로 가득 찼다. 놀라서 돌아보는 류연의 이마에 그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다 사면 되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카트를 밀었다.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류연은 품에 과자 상자를 가득 안고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윤규상은 그런 그녀를 힐끗거리며 운전했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마자 류연은 소파 위로 과자를 쏟아부었다. 와르르, 하고 쏟아지는 과자들을 보며 그녀는 아이처럼 웃었다. 윤규상은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겉옷을 벗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류연은 가장 먼저 아몬드 맛 상자를 뜯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말없이 받아들고 오독오독 과자를 씹었다. 달콤한 초콜릿과 고소한 아몬드가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그는 힐끗 류연을 보았다. 그녀는 입가에 초콜릿을 묻힌 채 오물거리며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제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았다. “이게 더 맛있네.” 그의 능글맞은 말에 류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거실에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와 달콤한 초콜릿 냄새만이 가득했다. 그에게 11월 11일은 더 이상 의미 없는 날이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날이 그에게는 특별한 기념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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